
"브로콜리 먹여야 한다"는 조부모님의 압박에 매일 식탁이 전쟁터가 되고 있다면, 정말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요? 저희 첫째가 두 돌 무렵, 생야채만 보면 입을 꾹 다물던 모습이 지금도 선명합니다. 당시 시어머님께서는 "어릴 때부터 골고루 먹여야 한다"며 당근스틱을 고집하셨고, 저는 그저 아이가 밥이라도 먹었으면 하는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소아청소년과 전문의들은 의외의 답을 내놓았습니다. 아이의 편식 문제는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면서도, 동시에 부모가 생각하는 것만큼 심각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생 야채를 꼭 먹여야 할까? 미각 발달과 영양 섭취의 진실
두세 돌 아이들이 유독 채소를 거부하는 데에는 과학적 이유가 있습니다. 이 시기 아이들의 미각 수용체(taste receptor)는 성인의 약 3배에 달합니다(출처: 대한소아청소년과학회). 여기서 미각 수용체란 혀에서 맛을 감지하는 세포를 의미하는데, 이 수용체가 많을수록 같은 음식도 훨씬 강렬하게 느껴집니다. 특히 쓴맛에 대한 감각이 예민해서 브로콜리나 시금치 같은 채소의 쓴맛 성분을 성인보다 몇 배 강하게 느낍니다.
그렇다면 채소를 반드시 생으로 먹여야 할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조리 방법은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채소를 섭취해야 하는 이유는 수용성 비타민, 무기질, 그리고 소화를 돕는 식이섬유 때문입니다. 이러한 영양소는 카레에 들어간 채소, 잘게 다진 야채볶음밥, 동결건조 야채 과자를 통해서도 충분히 섭취할 수 있습니다. 조리 방법에 따라 비타민 흡수율이 다소 차이날 수는 있지만, 안 먹는 것보다는 어떤 형태로든 먹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제가 직접 경험한 바로는, 아이가 거부하는 음식을 억지로 먹이면 오히려 역효과가 납니다. 저희 첫째는 당근을 정말 싫어했는데, 어느 날 카레에 잘게 다진 당근을 넣었더니 맛있게 먹더군요. 다 먹고 나서 "소윤아, 당근 들어갔었는데 맛있었지?"라고 말했더니 "나 당근 먹을 줄 아는 사람이야!"라며 뿌듯해했습니다. 이런 긍정적 경험이 쌓이면서 자연스럽게 편식이 줄어들었습니다.
채소 노출 빈도를 늘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마트에 갈 때마다 채소 코너를 지나며 "이건 당근이야, 이건 브로콜리야" 하고 보여주세요. 먹으라고 강요하지 않아도, 익숙한 재료는 언젠가 시도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린이집에서는 신기하게도 대부분의 아이들이 채소를 잘 먹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먹는 분위기, 선생님의 격려가 집에서보다 훨씬 효과적이기 때문입니다.
덩어리 음식 거부, 저작 운동 걱정은 기우입니다
네 살 아이가 고기 덩어리를 뱉어낸다고 해서 저작 능력(씹는 능력)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닙니다. 저작 운동이란 음식을 잘게 부수고 침과 섞어 삼키기 좋은 상태로 만드는 일련의 과정을 말하는데, 이는 과자나 견과류를 씹을 때도 충분히 이루어집니다. 실제로 진료실에서 "우리 아이는 고기를 너무 못 씹어요"라고 걱정하는 부모님께 "과일은요? 견과류는요?"라고 물어보면, 대부분 잘 먹는다고 답합니다. 그렇다면 그건 씹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단순히 고기를 싫어하는 취향일 뿐입니다.
아이들이 고기 덩어리를 거부하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고기를 오래 씹고 있으면 맛있는 육즙은 이미 삼켰고, 입안에는 질긴 힘줄과 비린 냄새만 남습니다. 게다가 덩어리가 크면 삼키기도 부담스럽죠. 그럴 바에야 잘게 잘라주거나, 갈비찜처럼 부드럽게 조리한 고기를 주는 것이 훨씬 현명합니다(출처: 식품의약품안전처 영유아 식생활 가이드).
솔직히 제 경험상, 아이가 지금 큰 덩어리를 안 먹는다고 해서 평생 그런 건 아닙니다. 저희 아들도 이유식 때부터 고기 질감에 민감했는데, 지금은 맛있는 고기는 잘 먹습니다. 다만 성인이 먹어도 질긴 고기는 귀신같이 골라내더군요. 블라인드 테스트를 해봤는데 정확도가 거의 100%였습니다. 아이들의 미각과 촉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예민합니다.
만약 모든 음식을 통째로 삼키거나, 물조차 제대로 못 삼킨다면 그건 연하 곤란(삼킴장애)이나 치아 문제일 수 있으니 소아과 진료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다른 음식은 잘 먹는데 특정 식감만 거부한다면, 그건 단순한 취향입니다. 억지로 먹이면 고기 자체에 대한 거부감만 커질 뿐입니다.
명확한 기준 세우기가 필요해요
아이의 편식 문제로 식탁이 전쟁터가 되는 가정이 많습니다. 하지만 저는 먹는 것보다 잠자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이 잘 자야 성장호르몬이 분비되고 면역력이 강해지기 때문입니다. 싫어하는 음식을 억지로 먹이려다 식사 시간이 즐겁지 않으면, 먹는 것 자체에 거부감이 생깁니다. 저희 첫째는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간장계란밥만 찾았는데, 급식을 먹으면서 친구들과 함께 다양한 음식을 접하더니 지금은 메뉴 선택지가 정말 넓어졌습니다.
육아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각 가정의 상황과 아이의 성향에 맞게, 부모가 명확한 기준을 세우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조부모님의 조언도 고마운 일이지만, 실제로 아이를 키우는 건 부모입니다. 편식은 성장 과정에서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시간이 지나면 대부분 해결됩니다. 지금 당장 브로콜리를 안 먹는다고 해서 평생 편식쟁이가 되는 건 아닙니다. 조금 더 아이를 믿고, 즐거운 식사 시간을 만드는 데 집중해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