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자로 태어나면 성폭력이나 성희롱을 한 번쯤은 겪게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저 역시 초등학교 1학년 때 학교 화장실에서 낯선 남성에게 당한 일, 중학교 때 등굣길에 갑자기 가슴을 움켜잡히고 도망친 남자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당시에는 그게 범죄인지도 몰랐고, 누구에게 말해야 할지도 몰랐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제대로 된 성교육과 보호 체계가 있었다면 달랐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동 성폭력은 우리 사회가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이며, 예방을 위해서는 어른들의 인식 전환과 체계적인 교육이 절실합니다.
성인지 감수성이 성폭력 예방의 출발점입니다
성인지 감수성(Gender Sensitivity)이란 생물학적 성별 차이가 아닌, 사회적으로 구성된 성 역할과 고정관념을 인식하고 성 평등 관점에서 상황을 바라보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남자답다", "여자답다"는 틀에 갇히지 않고 개개인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시각입니다.
어린이집과 유치원은 아이들이 가정을 벗어나 처음 경험하는 사회입니다. 이곳에서부터 성 평등하고 평화로운 인간관계를 배운다면, 아이들은 훨씬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이 시기에 성별 고정관념이 강하게 작용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예를 들어 여자아이가 "남자애가 자꾸 괴롭혀요"라고 말했을 때, 어른들이 "너를 좋아해서 그래"라고 답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이는 '나를 힘들게 하는 행동도 사랑이면 참아야 하는구나'라고 학습하게 됩니다.
실제로 교육학자 샤이는 대학생을 대상으로 실험을 진행했는데, 30% 이상의 여학생이 전형적인 여성적 특성을 갖추지 않았고, 남학생 역시 30% 이상이 남성적 특성을 갖추지 않았습니다. 이는 성별 고정관념이 타고난 본성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학습된 것임을 보여줍니다. 저 역시 20살에 처음 만난 남자친구로부터 "사랑한다면 잠자리를 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게 당연한 줄 알았습니다. 아무도 성적 자기결정권(Sexual Self-Determination)에 대해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성적 자기결정권이란 자신의 성적 행위에 대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로, 타인의 강요나 압력 없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교사와 부모는 아이들에게 "느낌"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를 자주 만들어야 합니다. 오늘 기분이 좋았던 일, 나쁜 느낌이 들었던 순간을 매일 점검하고, 특히 신체 접촉과 관련된 불편함이 있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수영복으로 가려지는 부위를 누군가 만졌다면, 느낌이 좋았든 나쁘든 반드시 보호자에게 말하도록 교육해야 합니다.
그루밍 범죄의 위험성을 알아야 합니다
그루밍(Grooming)이란 성범죄자가 아동의 취약점을 파악하고 신뢰 관계를 형성한 뒤, 점진적으로 성적 관계로 유도하며 통제하는 범죄 수법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 아이를 길들여 성폭력의 피해자로 만드는 과정입니다.
2017년 해바라기센터의 상담 분석 결과에 따르면, 아동 성폭력 피해의 약 60%가 아는 사람에 의해 발생했습니다(출처: 여성가족부). 우리는 흔히 조두순 사건처럼 낯선 사람에 의한 납치와 폭행을 떠올리지만, 실제로는 신뢰하는 친척, 이웃, 선생님 등 가까운 사람에 의한 피해가 훨씬 많습니다. 그루밍 범죄자들은 특히 가정 환경이 불안정하거나 방임되는 아이들을 노립니다. 이런 아이들은 관심과 애정에 굶주려 있어, 조금만 친절을 베풀어도 쉽게 의존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루밍의 가장 큰 문제는 피해 아동이 자신이 피해자임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외형적으로는 아이도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피해 사실을 드러내기도 어렵습니다. 영국과 미국 같은 선진국에서는 그루밍 자체를 범죄로 규정하여, 실제 성적 접촉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도 아동을 유인하고 길들이는 행위만으로 처벌할 수 있습니다.
그루밍 피해를 입은 아이들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보입니다:
- 나이에 맞지 않게 퇴행 현상을 보임 (갑자기 어린아이처럼 행동, 야뇨증 등)
- 연령에 맞지 않는 지나친 성적 행동을 보임
- 특정 사람이나 장소를 갑자기 피하거나 두려워함
- 예전과 다른 행동 패턴을 보이며 쉽게 놀라거나 위축됨
보호자와 교사는 아이의 이러한 변화를 민감하게 포착하고, 혹시 부적절한 신체 접촉이 있었는지 조심스럽게 확인해야 합니다.
아동 성폭력 예방 교육은 어른을 대상으로 해야 합니다
기존의 성폭력 예방 교육은 "우리 몸은 소중하니까 함부로 만지면 안 돼요. 누군가 만지려고 하면 '안 돼요, 싫어요'라고 외치세요"라는 방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동 대상 성범죄자들은 사냥꾼의 속성을 가진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서 사냥꾼 속성이란 범죄자가 사전에 치밀하게 피해자를 물색하고 범행 환경을 조성하는 계획적 행동 패턴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범죄자는 이미 철저히 준비된 상태이기 때문에, 나보다 어린 아이가 "안 돼요"라고 말한다고 해서 멈출 리 없습니다. 오히려 아이가 저항했다가 가해자를 당황하게 만들어 더 위험한 상황이 될 수도 있습니다.
진짜 필요한 교육은 관계의 경계에 대한 것입니다. 사람과의 관계에 따라 허용되는 친밀함의 수준이 다르며, 그 경계를 넘을 때는 반드시 동의를 구해야 한다는 점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매일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 나누고, 아이가 무슨 말을 해도 믿고 도와줄 준비가 되어 있다는 신뢰를 주어야 합니다.
저는 20대 후반이 되어서야 제대로 된 성적 자기결정권을 갖게 되었습니다. 만약 어릴 때부터 "내 몸과 마음이 불편하면 거절할 수 있다", "사랑은 상대방을 불편하게 만드는 게 아니다"라는 교육을 받았다면, 훨씬 건강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아이들에게 비밀에 대해 가르쳐야 합니다. 비밀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서프라이즈(Surprise)는 누군가를 기쁘게 하기 위한 일시적 비밀로, 언젠가는 밝혀질 좋은 비밀입니다. 하지만 시크릿(Secret)은 나쁜 것을 감추기 위한 영원한 비밀입니다. 성범죄자들은 대부분 아이에게 비밀을 지킬 것을 강요합니다. 아이들에게 "나쁜 비밀은 약속했어도 지킬 필요가 없고, 오히려 바로 어른에게 말해야 한다"고 가르쳐야 합니다.
성폭력 피해 발생 시 전문기관의 도움이 필수입니다
만약 아이에게 성폭력 피해가 발생했다면, 기관 관리자는 피해 아동의 회복과 치유에 집중해야 합니다. 이때 외부 전문기관의 도움을 받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유아교육 전문가라 하더라도 성폭력 사건을 처음 겪는 경우가 많아 우왕좌왕하기 쉽고, 실수로 인해 상황이 더 악화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상담기관은 비밀 유지를 기본 원칙으로 하므로, 외부 노출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면 피해자 지원과 수사 지원을 체계적으로 진행할 수 있습니다.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서는 원생 간 성 놀이나 성폭력 유사 행동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특히 만 5세 전후의 아이들은 성 역할에 대한 호기심이 왕성하여, 어른의 눈에는 성적으로 보이는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발달 과정의 자연스러운 현상인지, 아니면 실제 문제 행동인지 구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무조건 가해자와 피해자로 규정하여 엄벌하는 것보다는, 재발 방지와 피해 아동의 회복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은 다음과 같습니다:
- 피해 부모의 아픔과 어려움을 충분히 공감하고 지지하기
- 비밀을 철저히 유지하기
- 가해 아동의 부모에게는 이번 기회를 통해 아이의 행동을 교정할 수 있음을 설득하기
- 상담 과정과 대응 조치를 꼼꼼하게 기록하기
특히 주의해야 할 점은 아동 진술의 오염을 막는 것입니다. 아동 성폭력 사건은 물적 증거가 없고 아동의 진술이 유일한 증거인 경우가 많습니다. 어른이 "이렇게 말하라"고 연습시키면 진술이 오염되어 증거 능력을 상실할 수 있습니다. 피해 의심이 들 때는 개방형 질문만 하고, 가능한 한 빨리 해바라기센터 같은 전문기관에 연계하여 진술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영상 녹화를 진행해야 합니다(출처: 대한민국 경찰청).
또한 성범죄자 취업제한 제도에 따라, 아동복지시설과 유치원, 어린이집 등에서는 채용 시 반드시 성범죄 전력을 조회해야 합니다. 아동 및 청소년 대상 성범죄 신고의무 제도도 중요합니다. 아동 대상 성범죄는 피해자가 스스로 신고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를 인지한 성인은 즉시 수사기관에 신고해야 합니다.
아동 성폭력 예방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저처럼 어른이 되어서야 뒤늦게 깨닫는 것이 아니라, 어릴 때부터 제대로 된 성교육과 보호를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아이들은 보호받을 권리가 있고, 어른들은 함께 협력하여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갈 책임이 있습니다. 성인지 감수성을 높이고, 그루밍 범죄의 위험성을 인식하며, 피해 발생 시 전문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는 것. 이것이 우리가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입니다.